만일 이 게임의 제목을 보고 대번에 어떤 동화를 떠올렸다면, 분명 <오즈의 마법사>에 대한 기억이 비교적 선명하게 남은 분일 겁니다. 그리고 제작사 홈페이지에 소개된 등장인물 중 오즈마 공주, 마녀 몸비, 틱톡, 진저 장군 등을 보고 눈이 번쩍 뜨였다면, 이 동화 시리즈의 첫 작품에만 그치지 않고 이후 발표작들도 꾸준히 찾아본 팬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도로시가 오즈의 마법사를 만나기 위해 찾아가는 에메랄드 시티의 이름 뒤에 느와르 장르에서 가장 익숙한 단어 'Confidential'이라는 단어가 따라붙고 있다는 점은 어드벤처 게이머 및 추리소설 애호가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합니다. 제아무리 정치적인 함의를 듬뿍 담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 본질은 어디까지나 동화인 <오즈의 마법사>와 느와르의 결합이라니, 네로 울프가 탭댄스를 춘다는 것만큼 신기하면서도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게임은 <블랙웰 레거시(Blackwell Legacy)>와 <블랙웰 언바운드(Blackwell Unbound)>로 일약 인디 어드벤처 게임계의 총아로 떠올랐던 Wadjet Eye Games의 최신작입니다. 원래는 이 블랙웰 시리즈의 최신작, <블랙웰 컨버전스(Blackwell Convergence)>가 제작 중에 있었습니다만, 캐주얼 게임 배급사인 PlayFirst와 손잡고 제작 중인 작품의 완성을 미뤄가면서 발표한 작품이 바로 <에메랄드 시티 컨피덴셜>입니다. 제작 후 배급 계약을 체결한 것이 아닌 애초에 기획단계부터 함께 한 게임이니 만큼 캐주얼 게임의 특징이 강하게 녹아들어 있습니다. (뭐, 제가 한 캐주얼 게임이라고 해봤자 몇 개 안 됩니다만...;;) 뒤에 언급하겠지만, 이러한 캐주얼 게임과 정통 포인트 앤 클릭 어드벤처 게임의 결합은 기대 이상으로 잘 어울립니다.
이 게임은 제목 자체를 <오즈의 마법사>에서 따온 것뿐만 아니라, 핵심 세계관과 등장인물을 고스란히 빌려오고 있습니다. 주인공인 페트라 정도만 오리지널 캐릭터일 뿐, 작품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핵심 캐릭터들은 모두 동화 속에서 이미 한 자리를 차지했던 인물들입니다. 그래서 원작에 대한 기억이 선명할수록 플레이하는 재미가 좀 더 높아집니다. 게임 속에서 몸비와 글린다는 왜 대립하는지, 진저는 장군씩이나 되는데 왜 그리 어려보이는지, 허수아비는 왜 그렇게 뒤에서 관망하는 태도를 취하는지, 이처럼 작품 속에서 엿보이는 등장인물들의 미묘한 태도와 관계는 모두 원작에 기반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원작은 요소들은 20세기 초 미국적인 스타일로 변형되어 느와르 장르로 재탄생합니다. 마법의 세계이지만 마법이 법으로 금지된 시대라는 설정은 영락없는 금주법 시대의 패러디이죠. 이러한 세상에서 동화 속의 주인공들 역시 느와르 속의 인물처럼 행동합니다. 첫 장면에 악덕 변호사로 활동하는 사자가 등장하더니만, 호박 잭은 아예 마법 도구를 유통하는 밀수업자로 나섭니다. 허수아비는 뿌리깊은 범죄 집단 앞에 무기력한 정치가이며, 급기야 오즈의 마법사는 이제 진짜로 마법을 배웠지만 실제로 할 수 있는 일은 알량한 과외수업밖에 없는 상태로 등장합니다. 그나마 이 작품에 동화적인 색채를 잃지 않게 하는 것은 판파즘과의 대립이 중심축으로 자리 잡고 있다는 것 정도이죠.
게임의 난이도는 대단히 낮습니다. 아마 제가 해본 포인트 앤 클릭 어드벤처 게임 중 가장 낮은 낮이도를 자랑하지 않을까 하는데요. 어드벤처 게임을 몇 개 이상 해본 게이머라면 Walkthrough를 참고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손쉬운 진행이 가능합니다. 일단 이 게임의 퍼즐은 비교적 창의적이긴 해도 다분히 상식적인 사고방식으로 풀어낼 수 있습니다. 게다가 등장하는 아이템 수도 그리 많지 않고, 아이템의 조합 또한 게임 막판에 가서야 제한적으로 등장할 뿐입니다. 그리고 초반부의 진행은 거의 대화나 아이템의 단편적인 사용으로 이루어지고 후반부로 갈수록 조금씩 난이도가 높아지는 등 밸런스 배분도 상당히 훌륭합니다.
결정적으로 이 게임은 게임 시스템 자체가 라이트 유저를 위해 대단히 친절하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어드벤처 게임을 처음 접하는 유저가 가장 당혹스러워하는 것은 바로 게임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다는 것인데, 이 때문에 초반에 맵을 헤매면서 흥미를 잃기 일쑤입니다. 그런데 이 게임에서는 진행 라인을 아예 게이머에게 퀘스트 형식으로 제공합니다. 이 퀘스트라는 것이 대단히 잘게 쪼개져 있어, 퀘스트와 기록 저널의 조합이면 최소한 게이머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일은 절대 없습니다. 게다가 완료된 퀘스트는 게임 화면 하단 목록에 하나씩 추가되니 자신이 어디까지 게임을 진행했는지도 대번에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친철한 어드벤처 게임은 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이러한 세세한 퀘스트가 게이머의 자유도를 앗아가지는 않을까 하는 의문을 품을 수 있습니다. 포인트 앤 클릭 어드벤처 게임의 퍼즐이란 어디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자기결정권 또한 포함하는 것이거든요. 따라서 이러한 의문은 충분히 타당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게임에서만큼은 그러한 자기결정권의 약화가 주는 실보다는 득이 되는 면이 훨씬 더 많습니다. 비록 난이도는 낮아져서 성취감은 덜할지라도, 게이머가 우왕좌왕하는 것을 방지하여 이야기의 긴장감을 쫄깃쫄깃하게 유지시키는 역할을 유감없이 해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이 게임은 <오즈의 마법사>의 방대한 세계관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바, 어드벤처 게임으로서는 비교적 빠른 진행은 게이머의 집중력을 이야기의 중심축에서 일관되게 고정시킴으로써 원작의 내용과 게임상의 각색 사이를 유유히 둘러볼 수 있게 합니다. 결국 <오즈의 마법사>라는 거대한 원작의 존재와 이 게임 특유의 캐주얼틱한 시스템은 그 자체로 장점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둘이 서로 결합하며 서로의 장점을 극대화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겠죠.
이건 분명 제작사인 Wadjet Eye Games의 색채라기보다는 배급사인 PlayFirst의 영향입니다. 캐주얼 게임 포털인 PlayFirst로서는 라이트 유저도 부담없이 접근할 수 있는 게임을 원했을 테고, 그러한 결과물이 바로 이 게임인 셈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게임의 문턱을 낮추는 시도가 꽤 성공적인 것도 분명하죠. 게다가 이런 합작으로서 제작사가 얻은 것은 인디 게임으로서는 반가울 수밖에 없는 안정적인 제작 환경이고, 그러한 이점은 그래픽과 성우 더빙, 배경음악의 퀄리티로 충분히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전 게임들이 AGS 환경에서 제작되어 저해상도의 그래픽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장족의 발전인 셈이죠.
그리고 이처럼 게임이 캐주얼해졌다고 한들 제작사 고유의 색채를 잃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분위기 자체는 전작들에 비해 한결 밝아졌지만, 엔딩을 처리하는 방식은 영락없는 제작자 Dave Gilbert의 스타일이죠. 막판의 반전이야 충분히 예상 가능한 수준이지만, 모든 사건이 해결되고 난 이후 펼쳐지는 엔딩은 이 게임을 통틀어서 가장 인상깊은 부분입니다. 사실 이전까지의 게임 분위기와 비교하면 조금 이질적이긴 한데, 페트라의 추적행을 마무리 짓는 방식으로는 더할 나위 없는 것 또한 분명합니다.
물론 아쉬운 점도 몇 가지 있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아쉬웠던 점은 바로 이 게임에서는 진행에 있어 저널 시스템을 사용할 여지가 거의 없다는 점입니다. 이 게임에서의 저널은 게이머의 보조적인 길잡이 역할에만 충실합니다. 여기에 Pill 항목을 통해 원작에 익숙하지 않은 게이머에게 배경지식을 제공하고 있기도 하고요. 하지만 블랙웰 시리즈에서 저널을 이용한 추론 시스템을 선보인 바 있기 때문에, 이 시스템을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은 못내 불만거리입니다. 이 시스템이야말로 어드벤처 탐정물에서 가장 우아하게 써먹을 수 있는 시스템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아쉬움은 <블랙웰 컨버전스>가 대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상당 부분 희석됩니다. 원래는 이 작품을 먼저 기다렸고 새로운 게임을 이보다 앞서 제작하기로 했다는 소식에 아쉬운 감정을 느꼈던 제게는, <에메랄드 시티 컨피덴셜>의 기대 이상의 완성도는 예상치 못한 선물인 셈입니다. 어드벤처 게임은 나름 접근성이 힘든 장르라 다른 사람에게 권하기 난감했습니다만, 이 게임은 어드벤처 게임을 시작하는 사람에게 부담없이 권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추리소설로 비유하자면 <황제의 코담배갑> 같은 게임이랄까요.
이 글의 트랙백 주소 :: http://mcphisto.pe.kr/trackback/760
-
Subject: Emerald City Confidential (2009)
Tracked from Trivia [2009/05/01 19:14] 삭제모든 것이, 수상쩍게 익숙합니다. -몇몇 숨은그림찾기 게임을 시작으로 캐주얼 게임에 중독된 저는 최소한 세 개의 캐주얼 게임 배포 사이트로부터 뉴스레터를 받아보고 있는데(...) 그 중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