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 : 마쓰모토 세이초 걸작 단편 컬렉션 상 작가 : 마쓰모토 세이초 역자 : 이규원 출판사 : 북스피어 출판연도 : 2009 |
이 단편집이 국내에 출판될 수 있었던 이유는 크게 두 가지를 들 수 있겠는데요. 그중 마쓰모토 세이초 탄생 100주년이라는(그래서 영화나 드라마도 속속 제작되는) 화제성의 비중이 좀 더 컸을까요, 아니면 이 단편집의 책임편집을 맡은 미야베 미유키의 나름 넓은 국내 지명도의 비중이 더 컸을까요? 마쓰모토 세이초는 일본 미스터리의 거장인 만큼 국내에도 꽤 소개된 편이었지만, 2000년대 들어서는 DMB의 재출간을 제외하고는 이 단편집이 국내 처음 소개되는 작품이라 볼 수 있습니다. 최근의 일본 미스터리 붐을 생각하면 마쓰모토 세이초는 진작에 재조명 받았어야 하지만 의외로 잠잠했고, 이제서야 그 첫 테이프를 이 단편집이 끊었다는 것은 아마 미야베 미유키의 이름값에 힘입었다고 볼 수 있겠죠.
총 3권으로 구성된 단편집의 첫 번째 권을 읽어보니 조금 산만하다는 느낌을 줍니다. 이건 어쩔 수가 없어요. 수십 년에 걸쳐 발표한 수많은 단편들 중 그 일부만을 골라냈으니 시대적 간극 및 작품별 분위기가 급격하게 달라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겠죠. 게다가 상권만 먼저 나와 수록작 수는 더 적은데다 수록되어 있는 작품들 중 두 편은 소설이 아닌 르포르타주이니 작품별로 따로 노는 것 같은 이미지가 강한 것도 이해는 갑니다. 하지만 나머지 2권이 모두 출간되면 나름 앤솔로지로서 볼륨감이 확보되니 이런 느낌은 많이 줄어들 테니, 별로 우려한 점은 아니라고 보고요.
상권은 총 4개의 장으로 구분되어 있고, 각 장의 첫머리에는 미야베 미유키의 해제가 붙어 있습니다. 이 해제는 원본에도 당연히 첫머리에 붙어 있을 테고 글 자체도 도입부의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만, 국내 번역본에는 이를 뒤로 빼는 것이 더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이건 마쓰모토 세이초가 거장의 대우를 받고 있는 고국 일본과 한동안 작품 소개가 단절되었다가 최초로 단편집이 소개되는 우리나라의 차이 때문입니다. 이미 발표된 작품들을 다시 추려 모은 것이니만큼 일본에서는 해제 형식의 글이 작품 선정의 변을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대부분의 작품들이 처음 번역되는 국내 현실에서는 작품의 앞에 붙는 해제는 각 작품들에 대한 섣부른 선입견을 불러일으킬 수 있거든요. 더군다나 추리소설의 성격상 이 해제가 스포일러 역할을 할 수도 있습니다. (3장 같은 경우에는 아예 제목이 스포일러입니다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 해제는 각 장의 첫머리에 위치하는 것이 밸런스가 맞아요. 애초에 첫머리에 넣을 것을 전제로 쓰인 글이라 뒤로 빼면 더욱 난감해지거든요. 결국 이 책을 처음 읽는 국내 독자는 해제보다는 작품을 먼저 읽고, 나중에 해제를 읽은 후 한 번 더 각 작품을 읽는 편이 좀 더 즐거운 독서가 될 수 있을 겁니다. 아무런 사전 지식 없이 읽어내려가는 독서와 사전지식을 충분히 갖춘 후 꼼꼼하게 하는 독서 두 가지의 경험을 할 수 있으니까요. 두 번이나 읽을 정도로 재미있는 책이냐 하는 질문에는 나름 긍정적으로 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단편집을 읽고 마쓰모토 세이초의 작품 세계를 파악할 수 있다는 말은 섣불리 할 수 없을 겁니다. 오히려 이 작가를 알기 위해서는 책 몇 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새삼 실감할 뿐이죠. 하지만 국내에 소개된 장편들에 비해 이 단편집이 가질 수 있는 장점은 명확합니다. 국내 번역된 마쓰모토 세이초의 작품들 중 이 거장의 세계에 대한 초대장으로서 이 단편집만큼 적당한 것은 없을 테니까요. 이 단편집을 통해 마쓰모토 세이초의 세계를 살펴보는 것은 낙엽이 떨어지는 가을 숲으로 들어가 빨갛게 물든 단풍잎을 주워 책갈피에 끼워넣어 보는 것과 같습니다.
어느 <고쿠라 일기> 전
모리 오가이는 일본 근대 문학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지만, 이 작품이 흥미로운 것은 모리 오가이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모리 오가이의 생애를 추적하는 사람의 일대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건 유명인의 비화를 파헤치는 것과는 사뭇 다른 재미를 주는데, 이는 인생의 의미를 한 곳에서 찾을 수밖에 없는 사람에 대한 서글픔 때문입니다. 실존 인물이니만큼 그의 행적의 결과 또한 미리 정해져 있지만, 섣불리 감상적인 태도로 빠지지 않고 마무리 짓는 모습이 꽤 마음에 듭니다. 이 작품의 이미지는 뒤에 수록된 <삭제의 복원>으로 이어집니다.
* 장애인 비하 논란을 염려해서 굳이 주석을 달아놓은 것은, 실제 작품 속의 묘사가 어떻든 참 부러운 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공갈자
굳이 이 책에서 가장 심심한 작품을 꼽자면 아무래도 이 작품일 겁니다. 류타의 초반의 태도나 이후의 심리 변화의 맥락은 충분히 재미있고 이해도 가지만, 그 과정 묘사가 좀 성기다 보니 마지막 부분의 행동이 좀 생뚱맞게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작품은 분량이 좀 늘어났으면 좀 더 재미있었을 거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하긴, 스토커의 정서를 별로 안 좋아하는 저로서는 류타의 감정의 흐름이 충실하게 묘사되었더라면 받아들이기에 좀 버거웠을 거라는 생각은 합니다.
일 년 반만 기다려
부부간에 일어나는 살인사건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소재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이 작품에서 이 소재를 다루는 방식이 참 마음에 듭니다. 부부간 치정사건을 선정성을 극도로 억제한 서술로 그려내면서, 동시에 범인의 진짜 의도 또한 그렇게 억제된 선정성 사이에 꼭꼭 숨겨두는 효과를 내고 있습니다. 여기에 진상이 밝혀지는 방식을 또 다른 관계자가 담담하게 토로하는 방식으로 처리한 것도 훌륭하고요. 그리하여 소재 자체의 선정성이 주는 효과는 충분히 누리면서도 결코 이에 휘말리지 않는 결과를 낳습니다. 그럼으로써 마지막에 진상이 밝혀져 쓸쓸한 결말로 이어지지만, 이 또한 앞부분의 분위기에서 그다지 벗어나지도 않고요.
지방지를 구독하는 여자
일본 미스터리를 읽다 보면 정사(情死)가 소재로 등장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마쓰모토 세이초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점과 선> 또한 정사를 소재로 다루고 있고 다른 작가의 작품들 중에서도 이 소재를 쉽사리 찾아볼 수 있는 것을 보면, 정사라는 건 일본 특유의 정서가 아닐까 합니다. 수십 년 전에 발표된 고전 추리소설이 으레 그렇듯 진상을 파악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니어서 스기모토의 한 걸음씩 내딛는 조사가 조금 심심하기도 하지만, 마무리 짓는 방식은 참으로 우아합니다. 만일 그 자리에서 결판이 나는 내용이었다면 오히려 뒷맛이 쓴 결말이었겠죠.
이외지리
도입부에서 따분한 경영 이론을 늘어놓는 것을 보고 사이먼 브레드의 단편 <너기 바>와 비슷한 스타일의 작품이 아닐까 예상했습니다만, 막상 끝까지 읽어보니 일본의 특유의 민담이 결합된 작품이더군요. 악의와 복수가 이야기 전반을 지배하는 작품임에도 범인의 심리는 전혀 묘사되지 않는데, 그게 더 상상력을 자극해서 오싹한 느낌을 줍니다. 결국 죽은 사람뿐 아니라 독자들 또한 작품 속에 등장하는 민담에 홀려버린 거죠.
삭제의 복원
이 책에서 가장 훌륭한 작품이 아닐까요. 1990년에 발표한 작품이니 마쓰모토 세이초의 말년에 나온 걸작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 단편과는 40년에 가까운 시간 차가 존재하는데도 모리 오가이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이 이 두 작품을 튼튼하게 연결시켜 준다는 점에서, 두 작품이 한 책에 수록되어 있다는 사실이 좀 더 각별해집니다. 모리 오가이의 삭제된 일기에서 시작된 의문을 파헤치는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지만, 사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파악한 내용 자체가 아니라 그러한 일련의 과정 전부입니다. 나이 든 소설가와 젊은 조교가 조사하는 모리 오가이의 생애는 각각 날줄과 씨줄이 되어 촘촘하게 엮이고, 이들이 벌이는 논쟁은 만만치 않은 울림을 냅니다.
수사권 외의 조건
미야베 미유키의 첫 번째 해제를 읽어본 후 일단 작품을 먼저 읽은 다음에 해제를 나중에 읽어보자고 마음먹고 페이지를 넘겨가고 있었는데, 이 작품은 아예 3장의 제목에서 좀 페널티를 먹고 들어갑니다. 다음 작품이야 소재가 그리 문제가 되지는 않지만, 이 작품은 그게 아니거든요. 이렇게 하나의 장치에 모든 것을 걸고 있는 단편으로서는 만만치 않은 타격을 받게 되는 셈입니다. 사실 이 작품에서 재미있는 것은 그 핵심 장치가 아닌 주인공의 계획 자체에 있습니다만, 아무리 봐도 어떻게 그 계획을 완벽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진위의 숲
위작의 세계는 언제 봐도 재미있는 소재이기도 하고, 이를 주인공의 동기 및 정서와 연결시키니 나름 운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되는 것이 마음에 듭니다. 다만 왜 그렇게 결말을 급격하게 마무리 지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럼으로써 작품 초반부에 엿보인 주인공의 고독과 허무가 막판까지 일관되게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은 좋았지만, 클라이맥스 부분이 아예 존재하지 않아 왠지 미완된 작품을 읽는 기분이에요. 작가가 표현하려고 하는 바가 무엇인지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이렇게 끝내지 않고서도 풀어낼 수 있는 방법은 분명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쇼와사 발굴 - 2.26 사건
상권을 채우고 있는 마지막 두 작품은 논픽션이지만, 의외로 앞서 수록된 소설과 큰 이질감을 느끼기는 어렵습니다. 일단 2.26 사건이라는 소재가 그 어느 픽션의 소재보다도 드라마틱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이러한 소재를 풀어가는 마쓰모토 세이초의 솜씨가 맛깔 나기 때문이기도, 반대로 소설에서도 논픽션을 연상케 하는 맛이 느껴지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다만 우리나라의 현대사가 워낙 드라마틱하고 뒷목을 잡게 하는 이야기가 많다 보니, 이쪽은 오히려 좀 낭만적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추방과 레드퍼지 - <일본의 검은 안개>에서
우리나라에 비해 일본 문학계가 부러운 점이라면 이와 같은 르포르타주나 논픽션이 문학의 한 영역으로 자리 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이런 논픽션 문학의 최고봉이 일요신문이라니 이거 좀 눈물겨운 상황이잖아요. <쇼와사 발굴 - 2.26 사건>보다는 좀 드라마틱한 맛이 덜합니다만, 결정적으로 일본은 이런 모습을 발굴해야 하는 역사가 되어버렸다는 점이 좀 약이 오릅니다. 우리나라에서 이건 아직 현재진행형이잖아요.
ps.
기대와는 달리 마쓰모토 세이초의 단편집 세 권은 북스피어의 추리소설 라인업인 221B에 포함되지는 않았습니다. 판형은 221B의 이름으로 나왔던 <셜록 홈즈 미공개 사건집>이나 <이니시에이션 러브>와 동일하지만 책등 상단이 비어 있으니 생각보다 좀 더 많이 아쉽군요. 뭐, 이 단편집이 221B에 포함되지 않을 수 있는 이유야 몇 개 생각해낼 수 있고, 대충 다 납득이 가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221B 라인업에 넣기에는 너무 큰 기획...이딴 게 아닐 바에야 크게 문제 될 리는 없고, 만일 이 단편집을 필두로 미야베 미유키처럼 마쓰모토 세이초의 작품들을 몇 권 더 낼 계획을 갖고 있다는 이유라면 쌍수를 들고 환영할 수도 있습니다.
다만 걱정되는 건 이겁니다. 221B는 북스피어의 추리소설 대표 브랜드가 아닌, 한 권만으로는 임팩트가 약한 작품들을 한데 모아놓는 2진 라인업의 이미지가 생겨날까 우려되는 것이지요. 이미 십수 권이 출간된 미야베 미유키를 이 라인업에 넣을 수야 없겠지만, 이 단편집 세 권마저 빠진 것을 보고 독자들은 '221B 라인업에 넣기에는 대작이기 때문에....'라는 생각을 하게 될 공산이 큽니다. 더군다나 출간 계획이 잡혀 있는 반 다인은 전집 기획이니만큼 이 라인업에서 빠질 것이 확실시되는바, 그 이미지는 더욱 공고화될 가능성이 높죠. 미야베 미유키에 S. S. 반 다인에 마쓰모토 세이초라니... 이거 치이지 않을 도리가 없잖아요? 여기에 <영원의 아이>로 필두로 지속적으로 출간될 텐도 아라타는 221B에 포함될 수 있을까요? 마쓰모토 세이초의 전례가 나온 이상 아니라고 생각하는 쪽이 이치에 맞겠죠.
뭐, 이건 분명 추리소설 애독자의 이기심이긴 합니다. 하지만 장르문학 임프린트나 브랜드 중에서도 추리소설 전문 브랜드는 각별히 눈여겨보게 되고 그 행로에 관심이 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100권을 눈앞에 둔 황금가지의 밀리언 셀러 클럽이나 판매부수 이상의 위상을 얻고 있는 영림카디널의 블랙캣 시리즈의 모습을 보면 북스피어의 221B가 지향하는 모습은 어떤 것인지 궁금해집니다. 이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으로 <마성의 아이>가 예고되었다 한들, 이 시리즈가 그 입지를 확고하게 다질 수 있을지는 현재로서는 회의적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