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술사의 연출과 트릭 - 구부러진 경첩

[아불라피아]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제목 : 구부러진 경첩
저자 : 존 딕슨 카
역자 :  이정임
출판사 : 고려원북스
출판연도 : 2009


존 딕슨 카의 역사 미스터리는 아직 국내 소개된 적이 없으니, 일단 1930~40년대를 풍미했던 그의 퍼즐 미스터리에만 이야기를 한정시켜 보죠. 작품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딕슨 카의 퍼즐 미스터리를 설명할 수 있는 큰 키워드 둘은 바로 불가능범죄와 오컬트일 것입니다. 그런데 주변에서 딕슨 카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사람들 중 이 두 가지를 모두 좋아한다고 하는 사람은 찾기 어려워요. 퍼즐 미스터리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오컬트적인 요소가 사족처럼 느껴져 작품의 완성도를 훼손하는 것처럼 느끼고, 오컬트적인 요소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작품 속에서 그러한 분위기를 충분히 살려내고 있지 못하다고 지적합니다. 그래서인지 국내에 소개된 작품들 중 일반적으로 가장 사랑받는 작품은 바로 펠 박사를 비롯한 시리즈물도 아니고 딕슨 카 특유의 트릭이나 오컬트적인 색채도 비교적 엷은 <황제의 코담배갑>인 것으로 보이고요.

하지만 딕슨 카 특유의 불가능범죄와 오컬트적 분위기를 한데 묶어 설명할 수 있는 말도 있습니다. 딕슨 카야말로 마술사라는 명칭이 가장 잘 어울리는 추리소설 작가가 아닐까 합니다. S. S.  반 다인의 정체성을 심리학자 쪽에 놓고 엘러리 퀸에게서 실용적인 논리학자의 이미지를 읽어낼 수 있다면, 딕슨 카의 작가적 특성을 표현하기에는 마술사보다 더 적합한 말은 없을 겁니다. 물론 여기서 마술사의 정의는 요새 스포츠계에서 자주 써먹는 표현처럼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매직'을 일으키는 이미지가 아닌, 철두철미하게 실용적인 트릭을 고안하고 이를 화려한 연출로 감싸 안는 프로페셔널 공연 마술사 쪽에 분명한 방점이 찍혀 있습니다.

여기서 '철두철미하게 실용적인 트릭'이라는 표현에 의구심을 표하는 분도 계실 겁니다. 딕슨 카는 밀실과 불가능범죄를 구성하기 위해 작위적이고 기계적인 트릭을 구사한다는 비판도 종종 받으니까요. 그런데 추리소설에서 사용하는 트릭과 공연 마술에서 써먹는 트릭의 성격은 조금 달라요. 퍼즐 미스터리의 트릭은 기본적으로 수수께끼풀이의 성격을 가져야 하기 때문에 논리나 직감으로 사건을 되짚어갈 수 있어야 합니다. 퍼즐 미스터리에서 페어플레이 논란이 가끔 나오는 이유는 이 때문이고요. 하지만 공연 마술에서의 트릭은 철두철미하게 관객의 눈을 속여넘겨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가능케 만드는 데 그 초점이 맞춰집니다. 그러한 트릭에 사용된 장치가 어떤 것이든 관객 몰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면 훌륭하고 실용적인 마술적 트릭인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마술의 트릭은 너무 간단해서 진상을 알고 보면 허무해지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순간이동 마술을 보며 '에이, 설마 쌍둥이는 아니겠지.'라고 웃어넘기지만, 사실 쌍둥이 트릭은 초창기 마술부터 지금까지 줄곧 애용되어 온 대표적인 마술적 장치인 걸요. 따라서 상당수의 마술 팬들은 마술 속에 숨겨진 트릭을 귓등으로라도 듣는 것을 꺼립니다. 가장 유명한 신체소실 마술이 거울을 이용한 간단한 트릭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 무슨 이득일까요. 그 알량한 정보와 맞바꾸게 되는 것은 환상과 감동인데요. 이에 대해서는 카토 모토히로의 <CMB 박물관 사건목록> 7권의 더 투르크 에피소드에서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 에피소드의 소재 또한 <구부러진 경첩>과 같은 움직이는 밀랍인형입니다.)

따라서 마술 공연에서 부각되는 것은 트릭이 아닌 연출입니다. 마술의 본질은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하는 불가사의와 환상에 기반하지만 이를 관객에게 전달하는 방식은 마술사 고유의 연출에 기반합니다. 그리하여 같은 트릭이라도 마술사의 개성에 따라 천차만별의 연출이 가능하고, 실제로 마술 대회에서 중점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트릭의 기발함 이상으로(마술의 트릭은 마술사의 생명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에, 트릭의 구조에 대해서는 아예 언급하지 않기도 하죠.) 관객들을 끌어들이는 흡인력입니다. 제프 맥브라이드나 데이비드 카퍼필드 같은 최정상 마술사들의 공연을 본 관객들은 그 불가사의한 트릭의 정체에 대해 궁금해합니다만, 사실 그들을 그토록 열광케 하는 것은 트릭이 아닌 공연 그 자체입니다.

딕슨 카가 즐겨 사용하는 트릭의 성격은 마술에서 사용하는 트릭과 어느 정도 비슷합니다. 특히 작가의 전매특허인 밀실과 불가능범죄의 영역에서는 트릭은 정교하다 못해 기계적으로 보이기 일쑤입니다. 사실 딕슨 카 자신은 독자들이 자신의 트릭을 어떻게 풀어내는지 별로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트릭을 구성하면서 그가 흩뿌려놓는 단서는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훈제 청어를 여기저기 걸어놓는 짓도 별로 하지 않아 독자들의 시선을 함부로 흐리려는 시도도 잘 하지 않고요. 따라서 독자들이 딕슨 카의 트릭을 풀기 위해서는 작품 속의 단서에 주목하기보다는 자신의 직관과 상상력의 힘에 좀 더 기대야 하는 경우가 많지요. 딕슨 카가 관심 있어하는 것은 그 트릭을 현실에서 그대로 실행했을 때 과연 마지막까지 딱 맞아떨어져 돌아가느냐입니다. 바로 마술에서 사용하는 종류의 트릭이죠. 딕슨 카의 세계에서는 어떤 복잡한 장치를 사용하더라도 그것이 현실에서 제대로 먹힐 개연성이 있으면 허용되는 경향을 보입니다.

이 작품에서 펠 박사의 첫 번째 추리를 볼까요. 이런 트릭은 셜록 홈즈의 세계에서는 등장 가능하지만 엘러리 퀸의 세계에서는 제거된 종류입니다. 작품 안에서 '발명된' 장치는 엘러리 퀸 식 소거법의 영역에 들어 있지 않거든요. 하지만 딕슨 카는 이런 장치를 대단히 능수능란하게 사용합니다. 그럼으로써 다른 작가들이 주로 심리적 장치로 밀실을 만드는 것을 즐기는 반면, 딕슨 카는 이런 심리적 장치 이상으로 기계적 트릭을 유용하게 써먹을 줄 압니다. 그리고 막상 진상을 접하게 되면 처음에는 황당하게 느껴지지만, 곰곰 뜯어보면 꽤 그럴듯합니다. 여기서 그럴듯하다는 말은 현실에서도 충분히 써먹을 수 있을 것 같다는 뜻이고요.

하지만 이런 트릭의 기발함과 정교함은 충분히 인정한다 해도 여전히 문제는 남습니다. 퍼즐 미스터리를 읽으며 작가와 치열하게 머리싸움을 벌이고 싶어하는 일군의 독자들은 (예, 접니다...-_-a) 작품 내적인 단서만 가지고 사건을 추리하기 어려운 이런 트릭을 그다지 반기지 않습니다. 단서를 조합하는 것만으로는 쉽사리 파헤치기 어렵고 작가의 특징이나 패턴을 파악한다 한들 모호한 짐작만 가능합니다. 변칙이라고 하기에는 어렵지만 온전한 페어플레이라고 하기에도 어려운 이런 트릭이야말로 퍼즐 미스터리의 세계에서도 손꼽을 정도로 난이도 있는 종류라는 것을 감안하면 이러한 최고 난이도의 머리싸움에 독자들이 쉽사리 참여할 수 없다는 점은 좀 아쉽습니다.

하지만 딕슨 카는 퍼즐 미스터리 작가 중에서도 손꼽을 만한 스토리텔링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의 대표적인 퍼즐 미스터리들은 다른 작품들과 비교해 봐도 좀 더 풍부한 이야기와 생생한 스릴를 제공합니다. 개성 넘치는 등장인물들은 자신의 역할을 활기차게 수행하여 종종 주인공 탐정을 밀어내기도 하고, 그들이 빚어내는 곁가지 이야기들은 때로는 사건 자체보다 더 매력적인 색채를 띠기도 합니다. <구부러진 경첩>에서 두 명의 존 판리가 벌이는 치열하면서도 우아한 신경전이 대표적이죠. 대사 하나하나가 얼마나 전략적이고 미묘한 뉘앙스를 띠고 있는지, 사건의 진상이 드러나면 새삼 앞 페이지를 재차 들춰보고 싶을 정도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이야기와 트릭을 연결시키는 장치로 바로 오컬트적인 요소가 등장합니다. <화형법정>에서도 그렇지만 이 작품에서도 오컬트적인 요소는 그 자체로 이야기거리가 되기보다는 트릭을 볼륨있게 포장하는 역할을 합니다. <화형법정>에 비하면 여기서는 좀 더 변죽만 울린다는 느낌이 강한데, 이는 펠 박사가 마녀 의식의 존재 자체는 인정하되 그 효과는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죠. 사실 딕슨 카의 퍼즐 미스터리에서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는 빈번하게 등장함에도 그 자체가 진지하게 다루어진 적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그 실체가 모호하며, 가끔 반짝이며 드러나는 순간에도 농담이나 아이러니의 일부로 사용될 뿐이죠.

하지만 이 작품에서 그로테스크한 분위기와 오컬트적인 요소는 트릭이라는 뼈대를 탄력 있게 둘러싸고 있는 살과도 같습니다. 전혀 관계없는 것처럼 보이는 사건을 연결시켜주기도 하고 종잡을 수 없을 것 같은 범인의 행동에 당위와 맥락을 부여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 자체만으로는 대단히 신선하고 효과적이지만 동시에 작위적이라는 비판을 들을 수도 있는 트릭을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유유히 헤엄치도록 풀어놓습니다. 그럼으로써 트릭의 작위성은 상당 부분 흩어지고 독자들의 접근성 또한 대폭 상승합니다. 여럿이 지켜보는 와중에 일어난 살인사건의 트릭과 아무도 움직일 수 없었던 밀랍인형을 움직이는 트릭의 정체에 대해 납득할 수 있는 이유는 일단 트릭 자체가 말이 되기 때문이기는 하지만, 그러한 이유의 상당 부분은 그러한 트릭을 납득시킬 수 있는 분위기에 기대고 있습니다.

이건 독자들이 오컬트에 대해 관심 있어하는지의 여부와는 별로 상관없는 문제입니다. 트릭 자체만 놓고 보면 고전 퍼즐 미스터리 작가 중에서도 가장 불친절하다고 할 수 있는 딕슨 카 특유의 사건 구성이 이성적 사고와는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오컬트적인 요소와 결합되어 근사한 화학 반응을 일으키는 것이니까요. 더군다나 이러한 분위기는 판리 경의 진위를 둘러싼 일련의 사건들을 서로 이어주는 맥락과 순서를 부여하기도 합니다. 진범을 끌어내는 펠 박사의 추리 과정은 마녀 의식과 움직이는 밀랍인형의 정체에서 시작되는 것을 봐도 알 수 있죠. 진상이 드러나는 마지막에 이르게 되면 오컬트적인 요소는 희미하게 그 자취만 남지만, 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한 도입부이자 핵심 단초였던 만큼 그런 식의 퇴장이 별달리 아쉽게 느껴지지도 않고요.

결국 이런 방식은 공연 마술의 방식입니다. 기상천외한 트릭만 뽐내거나 기술적인 측면에 지나치게 의지하는 마술사는 높은 평가를 받기 어렵습니다. 관객을 휘어잡는 마술사가 되기 위해서는 번뜩이는 창의력과 치열하게 연마한 기술 위에 공연 전체의 흐름을 유연하게 이끌어갈 수 있는 진행력과 연출력은 필수입니다. 그리고 공연의 유려한 진행을 위해 택하는 방식은 마술사마다 다르죠. 어떤 마술사는 관객의 참여를 적극 유도하고 어떤 마술사는 공연장 내 분위기를 몽롱하게 유지시키기도 합니다. 그리고 존 딕슨 카는 트릭에 살을 붙이는 방식으로 오컬트적인 요소의 도입을 선택했습니다. 딕슨 카를 불가능범죄의 거장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처럼 트릭 자체의 기발함에만 의지하지 않고 이야기와 분위기를 자신의 방식대로 통제해서 독자들의 눈을 끌어당기는 그 탁월한 연출 방식에 있는 것입니다.


ps. 작품 중간에 '검시관'이 재판을 진행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여기서 보이는 검시관의 모습은 우리가 알고 있는 사인을 조사하는 전문적인 기술자라기보다는 재판관의 모습에 더 가깝죠. 현재는 검시관의 역할이 엄격하게 구분되어 있지만 과거 영국 사법 전통에서 검시관의 역할은 현재보다 좀 더 다양해서 일반적인 조사 업무를 수행하는 준 재판관의 성격을 띠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예전에는 검시관이 꼭 의사일 필요는 없었고, 의사 자격증 대신 변호사 자격증을 갖고 있어도 검시관으로서의 활동이 가능했습니다. 원문에는 아마도 'coroner'로 표기되어 있을 텐데, 이는 'medical examiner'로 표기되는 현재의 전문적인 검시관과는 조금 차이가 있죠.

이 글의 트랙백 주소 :: http://mcphisto.pe.kr/trackback/744

::: 사람과 사람의 교감! 人터넷의 첫 시작! 댓글을 달아주세요! :::

  1. 몽쓰 [2009/03/08 00: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근데 출판사는 고려원미디어가 아니라 '고려원북스'입니다.
    고려원북스의 전신이긴 한데, 이젠 없는 이름이죠. ^^;;

    • acrobat [2009/03/09 17:58]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하하...그랬었죠...;;;
      블로그를 둘러보니 출판사 관계자 분이신 듯한데, 다음 작품도 기대하겠습니다.

  2. bluff [2010/06/20 18:4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아 ㅠㅠ 주인장님처럼 생각해주면 얼마나 좋을까요

    글과 다소 빗나간 이야기지만

    마치 마술을 즐기면 속아넘어가는 얼간이가 된다고 생각하는 정신병수준의 증세를 보여주는

    아니면 아직 중고등학생의 정신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분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인터넷만 둘러봐도...

    마술실력은 쥐뿔도 없지만 열심히 해보려고 길거리 돌아다니면서 마술을 보여드리면

    대부분의 여자분들은 우왕 ㅋ 신기하다 이지만 남자는 90%가 나이드셨든 대학생이든 무조건 지적합니다

    이쪽손에 있는거 아냐? 이것저것 지적하다 모르겠으면 그래 잘하네~

    하고 마치 무슨 너가 그런 잔재주로 속여도 난 놀라지 않을테다! 라는 반응이니..

    외국과 한국인의 문화차이일까요

    유독 우리나라만 허세랄까 자존심이랄까 이상한 부분에서 그런것들을 세우는 기분입니다..

    • acrobat [2010/08/08 22: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마술을 하시는군요!! 전 그래서 트릭을 까발리는 마술사는 마술사라고 생각하지 않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