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목소리

[숯돌거울]
우리 집 앞에는 꽤 큰 주상복합건물 한 채가 서 있다. 그 건물을 지을 당시 소음, 분진의 문제도 있었지만 가장 직접적인 문제는 다름 아닌 일조권이었다. 고작 6층짜리 건물 몇 미터 앞에 수십 층짜리 건물이 들어선다는 것은 그 결과를 뻔히 예측할 수 있는 일. 그래서 공사 초기에 꽤나 다툼이 있었고, 결국 가구당 얼마씩의 보상금을 지급하고 건물 사이에 공간을 충분히 두는 것으로 타협을 보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막상 건물이 완공되고 난 이후에는 일조권에는 별로 영향이 없었고(두 건물 모두 정남향이 아니었던 탓이 크지 않나 싶다.) 오히려 차도에서 나는 소음을 차단해 주는 효과가 있는 것도 같아 조금 허무하기도 했다.

앞 건물에 영어학원이 입주하면서 저녁 시간이 되면 두 건물 사이의 공터는 중고딩들로 들끓게 되었다. 그 공터가 은근히 은폐되어 있으면서도 꽤 넓은지라 모여서 이야기하기에 꽤 좋은 장소라서 자꾸만 같은 장소에서 모이는 것도 충분히 이해는 간다. 오죽하면 밤이 되면 폭주족 일부의 아지트가 되기도 할까. 한창 에너지가 넘치는 애들을 모아놓았으니 목소리가 커지는 것은 당연지사.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그렇기 시끄럽게 떠드는 녀석들 거의 전부가(심지어는 새벽 두세 시쯤 찾아오는 녀석들마저) 상당히 예의 바르다는 것이다. 이쪽 창가에서 누가 시끄럽다고 말이라고 할라치면 공손히 사과하고 뽈뽈 흩어지는 모습은 말로만 들어왔던 요즘 애들 같지가 않다. 지난 여름이던가 밤에 무심코 창밖을 내다봤는데 아이들이 창가의 내 실루엣을 보고 일제히 고개를 숙이며 사과해서 당황했던 일화도 있다. 나 그때 황토 모시메리 입고 있었단 말이다...;;

그런데 요 1년여 동안 창문을 통해 계속해서 어떤 여자의 노랫소리가 들리고 있다. 음색으로 보건대 아무리 많아 봤자 20대 초반은 넘지 않을 것으로 보이고, 실력 자체도 일반인이라고 가정하면 상당히 좋은 편이다. 호흡과 발성이 안정되어 있어 반주가 없어도 꽤나 듣기 좋은 소리를 들려주고, 성량이 꽤 좋은 편이어서 멀리 잘 울려 퍼지는 음색을 갖고 있다. 바이브레이션을 그다지 사용하지 않는 스타일도 마음에 들고, 아울러 자기 음역대를 잘 알고 있는 듯 고음 처리도 비교적 무난하게 넘기곤 한다. 여기에 심할 때는 하루종일 노래를 부를 수 있을 정도로 강한 목의 소유자이기도. 전업 뮤지션이라면 모르겠지만, 일반이이거나 아마추어 뮤지션이라면 어느 자리에서도 어필할 수 있는 수준의 목소리로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 사람이 부르는 노래는 대개 한 곡뿐이라는 것, 그리고 그 곡의 제목을 도통 모르겠다는 것이다. 아주 가끔 다른 가요라든지 팝송을 부르는 것을 들어보면, 한 곡만 들입다 파서 좋게 들리는 것이 아니라 나름 노래에 재능이 있어 다채로운 곡을 소화할 수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왜 이 사람은 한 곡만 주구장창 부르고 있는 것인지. 가요에 나름 빠삭하다는 친구에게 무려 휘파람으로-_-a 불러주기도 했는데 아직 그 곡의 제목은 알지 못했다. 어차피 나에게는 창밖에서 들려온 노래가 원곡인지라 그렇게 절실하게 찾고 싶은 마음은 생기진 않지만.

이쯤 되니 상상력이 슬슬 발동하기 시작한다. 분명히 저 목소리는 어느 정도 트레이닝을 받은 것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고, 메인으로 부르는 곡은 다른 곳에서는 비슷한 멜로디마저 들어본 적이 없다. 그렇다면 혹시 이 사람은 데뷔를 준비하며 열혈 연습 중인 가수 지망생은 아닐런지. 앞 건물의 모처에는 모 기획사의 숙소가 있고, 이 사람은 그곳에서 숙식하면서 데뷔가 점점 미뤄지는 것을 한탄하며 불철주야 연습에 매진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 데뷔가 계속 미뤄지는 것은 요즘 가요시장이 섹시 트렌드가 대세라 발라드를 부르는 신인은 그리 수요가 없기 때문이 아닐까. 여기까지 상상하고 한숨 푹.

이런 상상을 방해하는 생각도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딱 봐도 임대료가 비싸 보이는 건물에 아직 데뷔도 하지 않은 연습생을 들일 이유가 없다는 거, 아무리 데뷔 전이라고 해도 프로 지망인데 연습하는 방식이 너무 아마추어틱하다는 거 등등. 현실적으로는 아무래도 앞 건물에 입주한 모 사무실에서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이 여흥 삼아 부르는 것이라는 가능성이 더 높은 것도 사실이다. 그 사람이 부르는 노래를 공들여 찾지 않는 것도 이미 발표된 노래라는 것을 알게 되면 이런저런 상상을 해보는 소소한 즐거움이 사라질까 봐서이고.

이 에피소드의 낭만적인 결말은 몇 달쯤 후 우연히 TV나 라디오에서 모 신인가수가 부르는 노래를 듣게 되는 것이 아닐까. 뭐, 딱히 그런 결말이 아니어도 좋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채 어느 날 노래가 중단되면 궁금해서 미쳐버릴 지도 모르니, 차라리 가수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유명을 달리한 원혼의 한 서린 귀곡성이기라도 하길. 아, 낮에도 들리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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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쇠붕 [2008/10/20 22: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 비슷한 스토리로 후배놈이 그렸던 단편만화가 생각나네요..
    잘 계셨나요. 드디어 댓글이 달려서 그김에 흔적 남깁니다. 슥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