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릭

[아불라피아]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학교는 그 자체로 하드보일드와 느와르의 세계일까? 이에 대한 대답은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는 것이다. 학교가 도시 속의 또 하나의 정글이라는 사실은 딱히 총기와 마약이 횡행하는 외국의 어떤 학교에만 해당되는 이야기도 아니고, 새벽부터 학생들을 불러모아 밤늦게야 토해내는 우리네 학교라고 딱히 다른 것도 아니다. 또래 집단들이 서로를 가장 손쉽게 접할 수 있는 장소이자 비교적 뚜렷한 집단 관리 체계가 존재하는 곳, 이곳은 사회에 대한 1차적인 울타리인 동시에 그 자체로 현란한 정치와 약육강식의 세계이기도 하다.

살짝 왕따인 주인공, 풋볼팀의 주장과 치어리더 애인, 잘 나가는 집단에 편입하고 싶어하는 소녀, 주인공의 친구 A 등은 고전적인 하이틴 영화의 전형적인 등장인물이다. 하지만 이 영화를 느와르 영화로 만드는 방식은 이러한 학교 내의 정치적 구도에서 하드보일드의 요소를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등장인물들의 면면에서 표피를 그대로 유지한 채 이들에게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하는 방식이다. <말타의 매> 같은 하드보일드 클래식에서 그대로 가져온 듯한 이 장르의 전형적인 요소들을 직접적으로 학교 구성원들에게 이식한다. 대표적으로 주인공 브랜든과 학교 교감과의 거래는 흡사 경찰과 조직 내 정보 제공자 사이의 비밀 접선같이 보일 정도이다.

이처럼 영화 내 등장인물들은 학교라는 공간 내에서 하드보일드 속 전형적인 구성원의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한다. 똑똑하고 적당히 주먹도 쓸 줄 아는 아웃사이더 탐정, 베일에 싸인 마약 조직 보스, 말보다 주먹이 앞서는 조직의 행동대장, 무언가 비밀을 감추고 있는 팜므 파탈, 그 구역에 대해 훤히 꿰뚫고 있는 뒷골목 정보제공자  같은 존재들이 고등학교 버전으로 그대로 등장한다. 심지어는 연극부를 통해 쇼 비즈니스의 존재까지 살짝 끼워넣고 있는 것을 보면 그 깜찍함에 할 말을 잃는다.

하지만 비교적 친절하게 영화는 처음부터 시침 뚝 뗀 채 필립 말로의 세계로 관객을 인도하지는 않는다. 영화의 시작은 에밀리의 시체를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하지만, 초반에 에밀리를 찾아 헤매는 브랜든과 그가 만나는 학교 학생들의 모습에서는 그나마 학교 안 이야기라는 인상이 강하게 남는다. 그리고 브랜든의 캐릭터 또한 초반은 좀 똑똑한 애어른의 이미지가 더 강하게 느껴진다. 첫 장면이 에밀리의 시체를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하지 않았다면 이 작품의 정체성을 눈치채는 것은 좀 더 늦었을 것이다.

그런데 브랜든이 에밀리의 시체를 발견하는 처음 시작 부분의 시점에 재차 도달하면서부터 이야기는 인정사정없는 하드보일드의 세계로 달려가기 시작한다. 에밀리의 시체를 발견하게 되는 장소가 커다란 하수도 입구이고, 이 사건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기 시작한 브랜든이 가장 처음 한 일은 바로 그 컴컴한 하수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그래서 상징적으로 보인다. 이로써 영화는 처음 장면으로 돌아가면서 자신의 정체성은 하이틴 영화가 아닌 필름 느와르라는 것을 공식적으로 천명한다.

영화 속에는 유독 주인공을 비롯한 등장인물들의 신발이 자주 풀샷으로 등장한다. 주인공의 접힌 바짓단 아래 보이는 낡은 구두는 물론이고 사라진 에밀리가 주인공과 재회했을 때 가장 먼저 프레임 속에 등장하는 것도 바로 주름이 잡힌 낡은 구두이다. 여기에 에밀리의 시체가 등장할 때도 카메라는 에밀리가 신고 있는 구두를 가장 먼저 비춰준다. 비교적 학교 내 캐릭터의 정체성에 충실한 브레인이나 브래드가 학생들이 흔히 신는 스니커즈나 운동화를 신고 있는 것에 비하면, 브랜든과 에밀리의 구두는 다분히 상징적이다. 여기에 조직 내 인물들은 보스에서 말단에 이르기까지 티끌 하나 없는 반짝반짝한 구두를 신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들의 낡은 구두에서는 일견 처연함까지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데 사건이 진행되는 내내 이 이야기는 고딩들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는 확인사살은 여기저기서 툭툭 튀어나온다. 상대 조직과 접선하러 가기 위해 엄마 차를 빌려간다는 설정은 애교에 속한다. 지하 아지트에서 협박과 고문을 자행하다 위로 올라오면 엄마가 간식을 제공하는 장면이나 허름한 밴 안을 리무진처럼 개조해서 폼을 잡고 앉아있는 모습을 보면 웃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런데도 감독은 자기가 끼워넣었을 그러한 코미디에는 코웃음 하나 치지 않고 천역덕스럽게 영화를 이끌어 나간다.

그런데 정작 재미있는 것은 이처럼 메인 스토리에 균열을 낼 수도 있는 장면들이 군데군데 등장함에도, 그러한 장면들은 이야기의 진지함을 전혀 훼손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라면 이러한 장면들은 영화를 블랙코미디로 만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수업시간에 휴대폰을 압수당해 중요한 연락이 안 되었다는 설정은 그 자체로는 아이러니일지언정 극적 흐름에서는 철저하게 분리되어 다루어진다. 장면 장면을 보고 웃을 수는 있어도, 영화가 끝나면 별달리 웃긴 영화라고 느껴지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다분히 과장된 것 같은 액션 시퀀스에 대한 느낌 또한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모습에서 느껴지는 것은 바로 만화와 애니메이션의 컷 감각이다. 개그컷에서 강백호가 SD 캐릭터로 변해 귀를 움찔거린다고 해도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면 얼마든지 진지한 모습으로 변해 공을 향해 몸을 날릴 수 있다는 것이 바로 만화 컷과 페이지의 특징이다. 이러한 만화의 탁월한 분절성은 이 영화의 컷과 신 분할에서도 어느 정도는 효과를 발휘한다. (물론 만화에서처럼 그 효과가 완전하게 발휘되지는 않는다. 이 때문에 상대적으로 '웃어야 할 대목'에서 웃는 관객이 적었던 이유일 것이다.) 이 영화에 필름 느와르나 하드보일드 소설 외에 <카우보이 비밥> 같은 애니메이션이 겹쳐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또 하나 이 영화에서 주목할 점은 바로 브랜든의 뒤를 따라가는 카메라 앵글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브랜든의 시점에서 진행되는 이 영화는 집요하리만큼 로우 앵글과 멀리서 잡는 풀샷으로 일관한다. 이러한 앵글은 대사 한 마디 놓치면 이야기 전개를 따라가기 힘든 브랜든의 사건 추적에 대한 필요 이상의 정보 제공을 차단할뿐더러, 독자들이 브랜든에 대한 필요 이상의 감정이입을 하는 것 또한 거부한다. 이러한 앵글 하나만으로도 감독 라이언 존슨은 자신이 하드보일드 장르적 특징을 충실하게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더군다나 이 앵글 자체가 영화에서 가장 큰 암시라는 점 또한 매력적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마지막 대목에서 살짝 고등학생의 세계로 들어온다. 사건이 대충 마무리된 시점에서 들리는 작은 한 마디의 목소리는 그 내용을 미리 짐작하고 있었음에도 그 날카로움이 무뎌지지는 않는다. 실컷 샘 스페이드처럼 행동하던 주인공에게 너도 아직은 어린애구나 하는 연민의 감정이 덧씌워진다. 그러다가 잠시 후 생각이 조금은 달라진다. 실컷 고독함을 뽐내던 하드보일드 속의 주인공들도 그 거칠고 우울한 향신료를 털어내면 그 정신연령은 브랜든에 비해 별달리 성숙했다고는 할 수 없으니까. 브랜든이 애어른인 건지 그들이 어른애인 건지, 사실은 별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학교와 하드보일드 뒷골목의 차이도 크게 다르지는 않지 않을까.
TAG. ,

이 글의 트랙백 주소 :: http://mcphisto.pe.kr/trackback/541

::: 사람과 사람의 교감! 人터넷의 첫 시작! 댓글을 달아주세요! :::

  1. acrobat [2008/02/25 10: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나저나 추레한 단벌 옷에 구부정하게 주머니에 손 찔러넣고 다니는 녀석이 왜 이리 멋있을까.

  2. 비니루 [2008/02/27 10: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주인공 정말 추레한데 멋져서 나도 추레하게 입으면 오히려 괜찮아 보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사실 이미 추레하긴 하지만... 바짓단 접은 것도 귀엽더군요.
    마지막 로라의 대사는 지금도 조금 궁금하긴 해요. mother라고 했다는데 잘 안 들렸고.

    • acrobat [2008/02/27 20:44]  [댓글주소]  [수정/삭제]

      찟어진 옷에 테이프를 붙이고 나타나도 전혀 위화감이 없어요. 오히려 이 녀석은 사건 몇 달 전 나름 깔끔했을 때가 더 촌스러워 보이기도 하죠.

      안 그래도 영화를 보고 대본을 찾아봤어요.
      "Mother-" the second is low, guttural and lost to the whistling wind.
      이걸 보니 뒷 말은 안 들리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그 뜻은 대충 짐작하시는 그거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