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웰 언바운드>는 인디 어드벤처 게임으로서는 상당히 높은 평가를 받았던 <블랙웰 레거시>의 후속편이자 프리퀄격인 작품입니다. 전작 <블랙웰 레거시>는 직관적이고 간결한 인터페이스, 직선적이지만 녹록치 않은 퍼즐, 게이머의 노력 이상의 성취를 느끼게 해주는 게임 시스템, 매력적인 캐릭터, 훌륭한 시나리오가 어우러진 참 멋진 게임이었습니다. 유일한 아쉬움은 인디 게임임을 감안해도 지나치게 짧은 플레이타임 정도이고, 10년 전의 개발 툴인 AGS를 사용했기 때문에 그래픽이 떨어진다는 것 정도를 굳이 덧붙여 볼 수 있겠죠. 저로서는 이 게임의 그래픽은 게임을 즐기기에는 별로 문제가 안 된다고 보고 있지만요.
<블랙웰 레거시>를 조금이나마 플레이해본 게이머라면, 아니 게임의 시놉시스 정도만 알고 있는 게이머라면 <블랙웰 언바운드>의 분위기를 대번에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블랙웰 언바운드>의 배경은 1973년 뉴욕으로, <블랙웰 레거시>보다 약 30여 년 전 과거를 다루고 있습니다. 여기에 이 게임의 주인공은 바로 전작의 주인공인 로잔젤라 블랙웰의 고모이자 전편에는 편지나 사진, 다른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단편적으로만 등장했던 바로 그 로렌 블랙웰이죠. 우리는 모계 혈통 유산의 전대 계승자인 로렌 블랙웰의 운명을 이미 알고 있고, 대개의 게이머들은 그 비극에 대한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먹고 이 게임에 손을 댔을 겁니다. (해외 결제 신용카드가 없음에도 갖은 삽질을 거쳐 구입하고 만 저도 여기에 포함됩니다...;;;)
로렌 블랙웰의 캐릭터는 다분히 냉소적이며 때로는 염세적이기까지 합니다. 어머니는 몇 년 전 정신병을 앓다 세상을 떠났고, 그 후 조이 말론이라는 유령 가이드가 자신을 찾아왔을 때야 비로소 자신의 어머니는 미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지 못했을 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어머니가 감내해야 했던 운명은 그대로 자신에게 이어지지요. 로렌은 조이와 함께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구천을 떠도는 유령들을 사후세계로 보내는 영매의 역할을 성실하고 담담하게 수행하지만, 그러면서 점점 삶과 죽음, 사후세계에 대한 감정이입을 애써 냉소적인 마음가짐으로 대치해 나갑니다.
아마도 로렌은 게임 사상 가장 담배 피우는 모습이 매력적인 캐릭터로 꼽아도 무리가 없을 것입니다. 담배를 한껏 빨아들여 불이 반짝일 때, 한숨이나 다름없는 긴 연기를 내뿜을 때, 결연한 느낌이 들 정도로 단호하게 꽁초를 내던질 때의 로렌의 모습은 그녀의 정서와 삶에 대한 태도를 대변합니다. 한시도 떨어질 수도 없는 조이와 적당히 배배 꼬인 독설로 농담을 주고받으면서 현실에 별로 애착이 없는 듯 행동하지만, 매일 밤 수상쩍은 꿈의 내용을 레코더에 녹음하고 영매로서의 자신의 삶의 끝을 어렴풋하게 예감하며 쓸쓸해할 뿐이죠.
근래 들어 유령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실은 쥐떼였거나 물이 새는 파이프였다는 것 때문에 번번이 허탕을 치던 로렌과 조이는 한꺼번에 두 명의 유령과 맞닥뜨립니다. 한 명은 강변에서 색소폰을 불고 있는 한 재즈 뮤지션이고 다른 한 명은 재건축 현장을 배회하는 중년 여성입니다. 이 세계에서 유령이 저세상으로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현실에 원한이 남아서이기도 하지만, 대개는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죽었다는 이야기를 아무리 건네봐야 무의식중에 자신의 처지를 외면하는 유령들에게는 먹힐 리가 만무하죠. 따라서 로렌과 조이는 이들이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계기를 만들기 위해 그들의 생전 행적을 추적합니다.
서로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두 유령의 자취를 되짚어가면서, 로렌과 조이는 이 두 사람 사이에 무언가 공통점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여기에 이들의 동선과 묘하게 겹치는 어떤 늙은 여성은 음울하면서도 광기 어린 분위기를 풍기며 이 두 콤비를 당황하게 만듭니다. 현세를 떠도는 유령을 돌려보내는 것만 해도 녹록지 않은데, 이들의 죽음에는 생각하던 것 이상의 속사정이 있다는 것을 감지하게 되는 것이죠. 그리하여 이 사건은 로렌에게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으로까지 이어집니다.
이 게임의 진행은 주로 다른 캐릭터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이루어지며, 각각의 등장인물에게 접근하는 것과 그들로 하여금 자신이 알고 있는 내용을 털어놓게 만드는 것이 핵심 퍼즐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 때 가장 중요하게 사용되는 것이 바로 전화번호부이죠. 전작의 인터넷 검색 시스템의 발전형이라고 볼 수 있는 이 전화번호부 시스템은 근래 게임으로는 드물게 직접 타이핑으로 정보를 검색해야 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게임을 진행해 나가기 위해서는 각 지역에서 얻을 수 있는 고유명사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참고로 엘러리 퀸을 쳐봐도 나오는 건 없습니다...-_-a 대신 제작자 이름인 Dave Gilbert를 쳐보면 나름 이스터에그 격인 대사가 나오기도 합니다.)
전작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던 노트 시스템은 여기에서도 여전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지만, 이 게임에서는 전작에서처럼 노트에 적인 정보들을 조합하여 새로운 정보를 이끌어낼 수 있는 여지는 그리 크지 않습니다. 이러한 노트 시스템은 게이머가 기울여야 하는 노력에 비해 느끼는 성취감이 대단하다는 점에서, 이 시스템을 활용하는 비중이 들었다는 점은 못내 아쉽습니다. (여전히 주요 시스템이자 전화번호부 시스템의 훌륭한 보조 역할을 하고 있지만요.) 하지만 전화번호부 시스템이 워낙 잘 짜여져 있어 게임 자체의 밸런스는 오히려 전체적으로 더 짜임새 있어진 모습입니다.
그리고 이 게임의 가장 큰 강점이라면 바로 음악입니다. 재즈 뮤지션이 주요 캐릭터로 등장하니만큼 작품 전체에 걸쳐 쓸쓸하면서도 잔잔한 재즈 음악이 흘러나오며, 그 음악 수준 또한 상당히 훌륭합니다. 위 스크린샷을 배경으로 흘러나오는 피아노의 색소폰의 듀엣은 이 게임 최고의 명장면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로 만만치 않은 울림을 이끌어 냅니다. 인디 게임에서 이 정도의 음악을 만나는 것은 상당히 놀랍습니다. 전작에서의 배경음악은 무난한 미디 음악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음악 퀄리티의 업그레이드만으로 작품의 품격이 한층 더 높아 보일 정도입니다.
그리고 스토리 면에서도 제작자의 센스가 대단합니다. 이미 비극으로 결말지어진 로렌의 삶을 구체적으로 펼쳐보이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이를 게이머들에게 조목조목 펼쳐보이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에요. 에둘러 돌아가지 않고 우직하게 이야기를 밀고 나가고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듭니다. 무엇보다 클라이막스를 헤쳐나가는 퍼즐 구성과 엔딩의 장면에는 상징적이 의미가 대단히 크게 자리 잡고 있음에도 이를 누구나 납득할 수 있도록 깔끔하게 정리하는 방식 또한 심금을 울리고요. 정말로 처연하게 슬픈 해피엔딩이면서도 따뜻한 시선을 보낼 수밖에 없는 새드엔딩이에요. 이번에도 여전히 많이 아쉬울 정도로 이야기가 짧다는 것을 제외하면 특별히 흠잡을 곳이 없습니다.
이미 이 시리즈의 차기작인 <블랙웰 컨버전스 (Blackwell Convergence)>의 데모가 발표되었습니다. 이 게임은 다시 1편의 주인공인 로잔젤라의 시대로 돌아왔습니다. 유령인 조이야 3편에서 모두 건재하지만, 앞으로 로렌은 게임 속 회상 장면 정도에서 간간이 모습을 보이는 것 외에는 주도적으로 등장하지는 못하겠지요. (사실 <블랙웰 언바운드> 자체가 로잔젤라 세계의 플래시백 정도로 기획되었다가 이야기에 살이 붙으면서 이 시리즈의 프리퀄로 독립한 경우입니다.) 로잔젤라 또한 매력적인 캐릭터이고 장기 시리즈로 계획되어 있는 세계관이니만큼 지금처럼 매력적인 게임들이 속속 발표되겠지만, 로렌 블랙웰처럼 매력적인 캐릭터와 <블랙웰 언바운드>처럼 농밀하면서도 쓸쓸한 이야기가 나오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벌써부터 로렌을 주인공으로 하는 외전을 만들어 달라는 팬들의 성화가 들리는 걸요.
ps. 게임 시스템이 안정화되면서 메인 스토리와는 상관없는 재미도 늘어났습니다. 게임 속 아이템인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특정 인물 4명의 사진을 찍으면 엔딩 이후, 제작자 코멘터리, 대사 녹음 현장, 미공개 사운드트랙, 러프 스케치 등을 접할 수 있는 메뉴가 활성화됩니다. 이 정도 부록은 메이저 상용 게임에서도 기대하기 힘든 선물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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