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 : 검은 집 저자 : 기시 유스케 번역 : 이선희 출판사 : 창해 출판년도 : 2004 |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렇기 때문에) 이 작품은 처음부터 끝까지 강하게 독자들을 끌어당깁니다. 눈에 확연히 들어오는 확연한 단점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을 읽어나가면서 느껴지는 서스펜스는 최근 몇 년간 읽었던 작품들 중 단연 몇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강렬한 흡입력을 자랑합니다. 그냥 이런저런 미사여구를 갖다 붙일 필요 없이 그저 한 마디면 족합니다. 무서웠어요. 이 때 무섭다는 것은 공포라기보다는 서스펜스 쪽에 더 가깝습니다. 공포의 본질을 미지의 존재에 대한 불안으로 생각하는 저로서는, 이 작품의 긴박함은 알고도 당할 수 밖에 없는 현실적인 위협에서 온다고 생각하니까요.
굳이 이 작품을 공포소설의 카테고리에서 떼어놓으려고하는 이유는, 이 작품 속에서 작가의 설명이 너무 친절하기 때문입니다. 기시 유스케는 작품을 이끌어나가는 요소들을 이미 초중반부에 독자들의 손에 쥐어줍니다. 대표적인 두 가지를 꼽자면 보험 지급에 얽힌 지급자와 수령자의 각양각생의 모습과 사이코패스의 특성에 대한 범죄심리학적 특성이지요. 범인의 존재마저 중반부에 이미 알려주는 이 작품에서 (목차를 꼼꼼히 보는 독자라면 이미 작품을 시작하면서 미리 알아차리겠지요.) 작품의 핵심 소재들마저 꼼꼼하게 독자들에게 설명하고 있다는 점은, 이 작품은 그 목적이 독자들로 하여금 알고도 수렁 속으로 빠져드는 기분을 맛보게 함에 있습니다.
기시 유스케는 작가의 길을 걷기 이전에 보험회사에서 근무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 그에게 있어 보험사기를 소재로 하는 작품을 쓰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보험사기에 대한 작가의 설명에 특히 감탄하고 싶은 점은 그 꼼꼼함과 더불어 확실한 절제 또한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주저리주저리 풀어놓지도 않고 (이건 특정 전문 분야의 종사하던 사람이 작가로 나설 때 종종 범하는 실수이지요.) 그러면서도 핵심적인 부분을 놓치지도 않습니다. 이로 인하여 독자들은 이런저런 사례들을 접하면서 지루함을 느낄 새도 없을뿐더러 작품 초반부를 거치면서 작품의 얼개를 확실하게 구축해 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작가의 성실함과 절제력을 작가의 전직에만 전적으로 연결시켜 설명할 수는 없는 것이, 기시 유스케는 사이코패스를 설명함에 있어서도 보험사기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을 때와 마찬가지의 장점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이 작가의 다른 작품인 <유리 망치>에서도 충분히 알 수 있듯, 꼼꼼한 사전 취재로 충분한 정보를 손에 쥐고 있음에도 이를 작품 속에서 보여줄 때는 철저하게 욕심을 자제하며 이야기의 흐름을 훼손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 극적인 요소까지 가미하여 풀어냅니다. 이러한 면이 기시 유스케의 작가로서의 커다란 장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독자들은 이처럼 작품의 배경 지식들을 손쉽게 이해하게 되지만, 그와는 반대로 시시각각 다가오는 범인의 위협에 그대로 노출되는 느낌을 받습니다. 범인과 사건을 이해할 수 있는 요소들은 모두 손아귀에 쥐고 있지만, 그로 인하여 그 어디로도 빠져나갈 수 없다는 두려움과 좌절감을 주인공인 신지에 투영시킬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이 작품에서 독자는 주인공의 처지를 절절히 느끼며 이에 대해 연민을 느끼는 대신, 파국이 뻔히 보이는 길로 달려가려는 주인공에 대한 안타까운 심정을 가슴 한쪽에 담고 신지의 행보를 쫓아가게 됩니다. 할 수 있다면 그의 어깨를 끌어당겨 말리고 싶어하면서, 찾아오는 결말이 파국이 아니길 빌면서 말이죠.
하지만 정작 주인공 신지의 캐릭터 구현은 너무 상투적이면서도 부자연스럽습니다. 범인에게 말려들어갈 수 밖에 없는 당위성을 전달하기 위해 신지가 어린 시절 경험한 사건과 그로 인한 트라우마를 내세우는 것 까지는 납득할 수 있습니다. 범인과의 직접적인 대결 이후 그런 트라우마를 극복하게 되는 과정 또한 어느 정도 들어맞는 맥락이고요. 하지만 그러한 트라우마를 야기한 과거 사건의 내용과 신지가 그러한 상처를 현재 시점에서 내비치는 방식은 상당히 진부할 뿐더러 유치하기까지 합니다. 더군다나 신지와 그의 연인인 메구미 사이의 관계와 그들이 겪는 장애를 그러한 트라우마 하나로 설명하려고 한 것은 이 작품 전체에서 가장 빈약한 설명이 아닐까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결말 부분에서의 두 사람의 모습에서도 난감함을 느낄 수밖에 없고요.
반면 범인의 캐릭터는 압도적이라고 할 만큼 작품의 후반부를 장악합니다. 범인의 목적과 행동 양식을 이미 알려준 상태에서 이러한 위압감을 보일 수 있는 것은, 앞서도 말했듯 작가의 꼼꼼한 설명이 범인으로부터 빠져나갈 수 있는 지점을 미리 차단해 버림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손쓸 여지가 없이 범인의 접근을 바라볼 수 밖에 없게 만들어 버린다는 점에 있습니다. 범인의 정체나 동기, 행동 양식에 대한 무지에서 오는 공포를 사용하지 않고, 이처럼 현실적으로 가할 수 위협에 대한 두려움만으로 독자들을 질리게 만들 수 있는 캐릭터는 흔치 않습니다.
이렇게 범인에게서 내러티브를 제거해 버리는 대신 발생할 수 있는 전체 이야기의 빈약함은 다른 방향으로 확장될 수 있는 보험 사기 모습과 주인공을 사건 속에 뛰어들게 하는 내적인 갈등구조에 의해 보충됩니다. 앞서서 주인공의 내면을 그려내는 시도는 실패에 가깝다고 했습니다만, 보험 사기를 그려내는 방식은 다른 쪽의 실패를 상쇄하고도 남을 정도로 흥미진진합니다. 보험 업계에서 발생할 수 있는 사기사건들을 추려내어 핵심적으로 전달하고 이를 중심 사건과도 절묘히 연결시키며 그 자체로 다른 사건으로 발전할 수 있는 여지를 열어두고 있습니다. 이전에 보험사기를 그리는 작가의 솜씨는 작가의 전직 때문만은 아니라고 했습니다만, 역시나 보험업계에서 10년 가까이 일했던 전력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겠죠.
ps. 곧 개봉 예정인 황정민, 유선, 김서형 주연의 영화 <검은 집>에서는 원작자인 기시 유스케가 까메오로 출연한다고 하죠. 그런데 시놉시스를 보면 '팜프 파탈' 이야기가 나오는군요. 맙소사. 소설을 읽었을 때보다 더한 공포가 밀려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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