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정은 목석? - 맹독

[아불라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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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맹독
작가 : 도로시 L. 세이어즈
역자 : 박현주
출판사 : 시공사
출판연도 : 2011

 
‘추리소설 사상 가장 지적인 연인’이라는 <맹독> 뒤표지의 문구는 얼핏 보면 단순한 홍보 문구로 보일 수도 있죠. 그런데 잠깐 생각을 해 보니 이게 나름 일리가 있는 말인 겁니다. 비록 해리엇 베인 자신은 같은 해에 등장한 역대 최고의 여성 탐정에게 빛이 바랬어도, 피터 윔지와 해리엇 베인의 조합이 황금기 추리소설을 대표하는 탐정 커플이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게다가 당시까지만 해도 실제로 연인다운 분위기를 풍기는 커플은 더욱 찾아보기 어려웠기도 했고요. 이들은 사실상 이후 우후죽순으로 등장한 이른바 부부탐정단의 효시(라기엔 토미/터펜스 커플도 있지만...)이자 모범 답안이었습니다.

그런데 <맹독>에서 주목할 점은 이제 막 시작하는 이들 커플의 관계 자체보다는 해리엇을 대하는 윔지의 태도에 있습니다. 이 시기의 탐정들은 이성적으로 완성된 존재였고 여기에 로맨스가 끼어들 여지는 그다지 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윔지는 주인공 탐정이 아닌, 제 1 용의자인 아름다운 여성에게 반해 기꺼이 누명을 감수하려는(=바보짓을 하는) 모모한 가문의 둘째 아들 같은 역할이라고나 할까요.(아, 모모한 가문의 둘째 아들이라는 건 맞군요...;;) 당시로서는 일반적이지 않은 모습이라는 점은 분명했습니다.

돌이켜 보면 윔지는 등장 시점부터 남달랐습니다. 황금기 추리소설의 주된 기능이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혼란한 사회상에 대한 위무였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전쟁의 트라우마를 생생하게 간직한 주인공의 등장은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전쟁 경험이 단순한 과거 이력이나 훈장으로 다루어지던 게 일반적이었으니까요. 현대 미스터리 작가들은 주인공의 트라우마를 썩 예쁘지는 않아도 없으면 허전한 액세서리처럼 사용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윔지의 캐릭터는 다분히 현대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는 도로시 세이어즈가 여성 작가이기 때문일 겁니다. 메리 로버츠 라인하트를 위시한 여성 미스터리 작가들은 단지 여성 캐릭터의 위상을 확립한 데 그치지 않고, 미스터리 속 세계의 사적인 영역까지 완성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윔지의 캐릭터 형성과 해리엇 베인의 존재 역시  같은 맥락에서 바라볼 수 있겠죠. 그녀가 등장하는 작품은 윔지 경 시리즈 중 ⅓ 가량에 불과하지만 이 시리즈에 끼친 영향은 지대했고, 그녀의 등장과 함께 작가의 필력도 물이 올라 최고 걸작들을 줄줄이 쏟아내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Gaudy Night>는 내주겠죠-_-?)

사실 <맹독>에 사용된 트릭은 독살에 관한 트릭 목록을 작성할 때 1번 아니면 2번 항목에 들어가야 할 정도로 굉장히 유명한 종류입니다. 추리소설에 있어 유명한 트릭이라는 말은 곧 수명을 다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하죠. 미스터리의 구조는 단순하지만 탄탄하고 단서나 복선 역시 확실하게 제공하고 있지만, 현대 독자들에게 시대를 감안해서 트릭을 받아들이라고 요구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니겠어요. 이건 현 시점에서 국내 독자들에게 처음으로 소개되는 고전 미스터리가 받아들여야 할 숙명일 겁니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에서는 트릭을 푸는 재미보다는 케이퍼물로서의 쾌감이 훨씬 두드러집니다. 특히 윔지나 파커를 대신하여 맹활약을 펼치는 클림슨과 머치슨, 두 여성의 활약 덕분에 후반부가 한층 드라마틱하면서도 유쾌하게 치닫습니다. 게다가 이 두 사람은 고전 미스터리에서 조연 정도에 한정되기 마련이었던 계층이라는 점 때문에, 이들이 윔지를 제치고 작품 전면에 나서는 모습에 한결 응원을 보내게 됩니다.

윔지 경 시리즈의 다음 출간 예정작은 이 시리즈의 최고 걸작으로 알려진  <Murder Must Advertise>더군요. 그렇다면 <Have His Carcase>는 건너뛴다는 의미일 테니, 이 커플링을 따라가려는 독자들은 좀 아쉽게 됐습니다. 그러니 <Gaudy Night>는 기필코 출간되어야...